종교

Sunday, May 4, 2008

창세기 1장-11장 - 08/17/2005

창세기

# 1,2장 - 전반부 1장 4절까지, 후반부 2장 5절부터 2장 끝까지

a. 하느님의 이름: 전반부는 엘로힘, 후반부는 야훼.

성서를 어느정도 상이한 문서들이 합쳐진 것으로 보는 설득력있는 가설이 있는데 엘로힘문서, 야훼문서, 제사문서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b. 창조순서:
전반부 (엘로힘문서) - 동물을 만든후 인간을 만드심
후반부 (야훼문서) - 아담을 만들고 동물을 만들고 여자를 만드심

c. 1장 26절: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우리"란?

# 3장 - 선악과는 애초에 왜 만드셨을까?

# 4장 - 카인과 아벨

a. 아벨의 제사만 반기시다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그런데 야훼께서 아벨의 제사만 반기셨다. 왜?

이스라엘 민족은 유목민족이다. 곡식은 제물로 취급을 안했던것같다. 그유명한 삼손은 "나실인"고, 더 후에가면 예후왕때인가 "레갑인"도 나온다. 이들은 정착생활후에도 유목민의 전통을 지키기위해 머리를 기르고 농경민족의 상징인 술을 마시지않고 유목민족처럼 천막에서 잔다. 종교적으로 극보수주의자들인듯...

b. 카인은 다른사람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한다. 그당시 사람은 아담, 이브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카인의 아내는?

# 6,7,8장
a.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결혼하다. 하느님의 아들?

b. 노아의 방주
바빌론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기록된 전설과 흡사하다. 바빌론 포로기때 성경이 쓰여졌다는 설에 힘을 실어준다.

c. 방주에 탄 동물: 깨끗한 동물은 7쌍씩, 부정한 짐승은 두쌍씩, 공중의 새도 7쌍씩

유인원, 원숭이, 고릴라등 영장류만 193종, 전갈 1000종이상. 전갈은 물과 접촉하면 곧 죽는다. 진화를 어느정도는 인정해야할듯...

# 9장

노아의 세아들, 셈,함,야벳. 그중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도록 저주받는다.

가나안은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이전에 시돈과 띠로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현지인들이다. 페니키아가 유명하다. 한니발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

성경은 이렇듯 그들이 태초부터 천대받도록 운명지어졌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나안은 다윗, 솔로몬때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보다 줄곳 강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정복한 신바빌론 느브갓네자르왕도 시돈, 띠로는 공격했으나 정복하지 못하고 결국 강화를 맺었다.

# 11장 - 바벨탑

바빌론에는 지구라트라는 거대한 탑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성서가 바빌론 포로기때 쓰여졌다는 가설의 힘을 주는 또하나의 사실인듯.

至大無外 至小無內

08/13/2005

by 惠施(혜시)

至大無外
至小無內

직역하면,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고,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다.

한마음교회를 그만 다니기로 결심하고 목사님과 집사님께 쓴 편지에 이 글을 인용했었다.

"한마음교회는 너무 보수적이어서 포함하는 범위가 적은데, 내 생각은 그 밖에 위치한다"라는 의미에서였다.

너무 작은 게 좋은 것도 아니고, 너무 큰 게 좋은 것도 아니리라.

경계가 헛갈리지 않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포용할 정도로 큰 것이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8/13/2005

천국의 열쇠는 독서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읽었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다. A. J. 크로닌의 또 다른 유명한 책은 "성채"인데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비슷한 시기에 읽은 같은 저자의 두 책중 하나는 줄거리 조차 기억 안나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 선명한 것은 "천국의 열쇠"란 책이 나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때문이다.

내가 한국에서 교회 열심히 다닐때 청년들끼리 돌려읽던 책이었다. 그런데 이상한건 나만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자.

한 신부가 중국으로 선교가서 전염병에 걸린 중국인들을 돌본다. 그리고 거기서 일생을 바친다.

단순히 자기의 일생을 희생하고 신의 뜻을 실천하고자한 신부의 일생을 그린 감동 드라마일까?

나에게 충격을 준 장면은...

전염병이 발생하여 수녀들과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데 의사인 신부의 친구도 같이 와서 같이 환자를 돌본다. 그 친구는 신자가 아니다.

그러다가 친구가 전염병에 걸려서 죽게되는데, 신부는 친구에서 천국에 가기위해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친구는 끝까지 거부하고 죽는다.

그러자 신부는 그 친구는 천국에 있다고 말한다. 옆에서 듣고있던 수녀가 반발한다.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천국에 가냐고...

그렇다. 로마서에 의하면 천국에 갈수있는 유일한길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거다.

이 신부의 모습이 현 카톨릭교회의 모습이고 수녀의 모습이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다.

책 제목도 "천국의 열쇠"이다. 책 제목만 봐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부분이다.

온갓 못된 짓만 일삼는 목사, 장로가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천국에 간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반대로 알라신의 뜻을 따라 평생을 바쳐 착한 일을 해온 이슬람 신자가 지옥에 간다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성경을 글자그대로 믿어야했던 사람들을 몇백년동안 고민하게 한 아이러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등장한게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이 신부는 나중에 부처님,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연에 써서 날렸던가? 가물가물...

지금 카톨릭의 모습은 종교다원주의다. 개신교 목사가 공식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면 교계에서 파문당한다. 실제로 몇명 파문당했다는 기사를 봤다.

나는 카톨릭의 영향을 받기 전에도 종교다원주의자였다. 기독교토론방에서 이런 논리를 폈다가 개떼같이 달려드는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적그리스도"라는 말까지 들었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조금이라도 문제의 대상이 되면 사람들은 생각하는 법을 잊는듯하다.

자류로부터의 도피 - 4/18/2005

나에게 Dr. Koch은 신같은 존재이다. 내가 그의 lab에 들어가게 된것은 지금까지 내 일생에 발생한 가장 큰 행운이었고 Dr. Koch의 판단을 틀린적이 없었다. 그래서 간섭받는걸 상당히 싫어하는 나 조차도 그냥 Dr. Koch을 믿고 따른다. 그는 항상 옳았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라는 믿음이 있기때문이다. 아마 Dr. Koch의 판단이 최적이 아니라고 생각될때 조차도 그의 판단에 따른지도 모른다. 이미 그는 나에게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의심조차 하기 싫기 때문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Erich Fromm의 유명한 저서의 제목이다. 그는 히틀러의 비이성적인 나찌즘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휘둘릴수있었냐하는 의문에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가 주는 선택의 다양성에서 오는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 선택을 대신 내려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될까 두려워한다. 대중은 동일한 몸짓으로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다. 그것이 신이 됐든, 알렉산더나 시저같은 영웅이었든...

성경을 글자그대로 믿는 대부분의 한국기독교와 일부 미국의 기독교를 보면 항상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요한복음 성경말씀대신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들중 과연 몇명이나 창조론을 무조건 믿는 대신 진화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봤고, 성경의 역사적 오류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말로 기를 쓰고 정당화시키는 대신 논리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귀울였을나 상당히 의심스럽다.

창조과학회에서 나온 책을 읽어본적이 있다. 과학한다는 그들이 왜 진화론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왜곡시키면서까지 창조론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들은 왜 과학을 하는걸까?

호기심반 무료함반으로 성당을 1년 정도 다닌 적이 있다. 처음에 "진화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종교가 대상이면 항상 도발적이다^^ 임지현선배의 대답이 나를 1년이나 성당에 다니게 만들었고 지금도 Cathoric에 대해서 언젠간 돌아갈 고향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대답은 "나는 하느님이 진화가 되게끔 세상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였다.

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런 유연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걸까?

그들은 죽었다. 그들은 뇌를 모두 땅바닥에 쏟아 버리고 머리를 짚으로 가득 채운 puppet이 되기를 원한다.

역시 자유는 감당하기 어려운가보다.

진정한 예배 - 10/27/2001

삶은 예배 - 독일 본헤퍼 목사님의 말이라 기억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얘기할때, 흔히 부모의 사랑과 같은 아카페라고 생각된다. 나는 아직(2001년 10월 현재) 미혼이고, 물론 자녀도 없다. 하지만 좀 부정확한 상상은 할수 있을것같다. 내가 부모라면 자녀들에게 과연 무엇을 바랄까? 자녀들이 아버지 어록을 만들어 그걸 매일 읽고, 아버지인 나를 찬양하는 글과 노래로 최소한 매주 한번씩 모여서 기념하기를 바라겠는가? 나는 자녀들이 그냥 건강하고 건전하게 커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지내기를 바랄것같다.

이런 의미에서 살아가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자기가 맡은일에 충실하고, 주위사람들을 배려할줄 아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아닐까?

행동의 변화는 전혀없는 상태에서, 단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다는 것만으로 구원받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그런 인간들이 구원받는다면 기독교에 정의는 없다.

물론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실수도 적지않을 것이고 자기의 실수를 정당화 하려는 한심한 시도도 많이 하곤한다. 그러나 그것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책임을 지고, 반복하지않으려 노력한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성경(bible)에 대하여 - 10/27/2001

성경 : 이스라엘 민족의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신앙고백...

이것은 안병무씨의 "역사와 해석"이라는 책의 명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역사를 약소국으로 외침에 시달려온 민족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여러 왕들을 평가할때,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느냐의 관점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그들은 받는 고통을 하느님에 대한 불충의 결과로 생각하기도 하고, 악한왕이라고 평가받는 여로보암 2세때의 번영을 하느님의 동정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듯 성경은 저자의 의도가 강하게 가미된 저술이다. 이러한 의도가 때로는 역사적 사실(fact)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의 기술들은 역사적 사실(fact)로 믿을 필요는 없는 듯 싶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1.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순서는 분명히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1장에서는 동물들을 창조하신후, 6째날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2장에서는 아담을 만든후, 동물을 창조하시고 이름을 어떻게 짓나 보셨다고 기술되어있다. 그 후 이브를 만든다. 1장의 하느님의 이름은 Elohim이다. 2장의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이다. 성경의 저자는 이렇듯 눈에 뻔히 보이는 모순을 성경에 제일 앞부분에 실어놓았다. 아마도 그는 그들의 전승들을 모두 소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의도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창조순서에 개의치 않았을것이다. 지금와서 이런 명백한 모순을 글자 그대로 믿기위해 정당화시키려고 교조적으로 이해석 저해석을 붙인다면, 우습지 않을까?

2. 엘리야의 후계자인 선지자 엘리사가 길을 가는데,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렸다. 그후 암콤이 나와서 몇십명의 아이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이게 하느님의 뜻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부분을 기술한 사람은 하느님의 선지자를 모독한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그 대가를 치루어야한다는 과격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고...

3. 욥기를 보자. 하느님이 사탄으로 하여금 욥을 시험하게끔 방치한다. 그 결과 사탄은 욥의 모든 재산과 자녀들의 생명을 앗아간다. 시험이 끝나자 하나님은 욥을 더 많은 재물과 자녀로 축복한다. 그럼 죽은 자녀들은 뭔가? 이건 그냥 예화가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해할수 없는 부분들을 짧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수 없는 하느님의 보다 높은 뜻으로 생각하고 그냥 믿으려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경의 저자가 결코 완벽할수 없는 인간이기에 짧은 식견과 역사관을 드러낼수 밖에 없었으리라고...

이런 성경을 글자 그래도 무조건 믿으려는 자세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방해만 될뿐이다.

"신"에 대하여 - 05/15/2001

종교는 두려움의 산물 - 로마의 한 시인

학부 4년 내내 이문제로 고민을 해왔던것 같다. 그러던중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아주 옛날 선사시대에 동굴에 살고있는 원시인들이 홍수, 화재, 천둥, 번개등의 자신들을 압도하는 자연현상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런 도저히 설명될수 없는 현상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산물이 "신"이라는 존재의 탄생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태초의 신은 단순했을것이다. 그당시 인간의 사고범위를 초월할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것 같다. 인간의 사고와 과학의 발달로 보다 발전된 개념의 신이 필요했으리라... 신의 개념은 인간 문명의 발달을 능가하지는 못하는것같다.

과학은 오랜시간동안 신의 적이어야만했다. 그동안 신이 해왔다고 당연시 믿어왔던 일들을 과학이 점차적으로 설명해왔기때문이다. 이로인해 신은 과학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고정관념(dogma)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던것같다. 신의 개념은 이에 상반되는 과학이 도저히 부정할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때야 비로소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으리라. 천동설이 그러했고, 지금의 진화론이 앞으로 그러리라고 생각된다. 그 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얼마나 수많이 갈등이 있었을까? 요즘 신학은 고고학에 많이 의존하고 있은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신학의 새로운 흐름을 현직에 있는 성직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성경을 보며 느끼는 하느님의 모습은 일관성이 없다. 아버지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자비롭게 용서하는 하나님, 잔인하게 처벌하는 하나님... 마치 인간들의 모습을 보는듯한... 하나님의 모습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의 성격과 형상에 대한 관념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신이 인간 관념의 산물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신이 있다, 없다는 논외이다. 과연 신이 "있다" "없다"는 인간의 관념으로 고착될수 있는가? 그건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결코 증명해낼수 없는 범위에 속해있다고 생각된다. 신이 있더라도 인간이 생각할수 없는 형태와 개념으로 존재해왔기에, 과거와 현재의 경전에 기록된 신의 형상과 성격은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